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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 데미안
새는 알에서 나가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라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당시 나는 열여덟의 괴짜 청년으로, 오만 가지 일에 조숙하면서 다른 오만 가지 일에는 뒤떨어지고 무력했다.
또래들과 비교할 때면 나 자신이 무척 잘났다는 건방진 생각이 들었다가도, 곧 열등감과 우울감에 빠졌다.
내가 천재 같다가도 반쯤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친구들과 섞이지 못했고 자책과 염려에 사로잡혔다. 나와 그들 사이에 절망적인 거리감이 느껴졌고,
나는 삶으로부터 격리 되었다.
오늘은 데미안 독후감입니다.
군대에서 만난 소대장님이 매년마다 읽는다고 했던 책이자,
동생에게 선물을 했지만 전혀 읽지 않았던 추억이 담긴 책이죠.
오랜만에 다시 읽네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자아 탐색
헤르만 헤세는 '자아'와 '성장'이라는 주제를 정말 좋아합니다.
'싯다르타'도 불교 + 자아 + 성장을 이야기하는 소설이죠.
개인적으로 20대에 데미안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하는데요?
20대 초반과 후반에 읽을 때 느낌이 다릅니다.
(아직 안읽어봤다면, 꼭 읽어보시길...)
맨 위에 적은 첫 번째 문장은 20대 초반에 가장 좋아했던 문구이고,
두 번째 문장은 지금 다시 읽었을 때 가장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차이가 느껴질까요?
세계에 대한 이야기
데미안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초반에 주인공은
부모님과 도덕, 종교에서 얻은 밝은 세계와
욕망, 죄, 혼란, 현실에서 보는 어두운 세계 사이에서
계속해서 헤매게 됩니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면서 아이처럼 구는 이중생활을 했다.
내 의식은 세상이 허용하는 밝고 익숙한 세계에 살면서 어렴풋이 보이는 새로운 세계를 부정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사건을 겪으며 성장해갑니다.
"밝은 세계"에 살던 주인공은
술에 빠져 "어두운 혼란의 세계"에 빠지기도 하죠
모든 것이 깨끗하고 빛나고 우아한 순수의 정원에서 자란 내가,
바흐의 음악과 아름다운 시를 사랑했던 내가 이런 모습이 되다니!
술에 잔뜩 취해 자제력을 상실한 채 얼간이처럼 낄낄거리던 내 웃음소리가 아직도 들려와서
나는 심한 구역질과 분노를 느꼈다. 그게 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스러운 양심의 가책에서 상당한 쾌감이 느껴졌다.
내 마음이 너무나 오랫동안 전적으로 무심하게 한구석에 비겁하게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자책이나 전율, 영혼의 추악한 감정들까지도 반가웠던 것이다.
어딜가도 소속된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정답을 찾습니다.
알을 깨고 나오게 됩니다.
부모가 가르친 밝은 세계는
세상의 절반만 있던 세계였습니다.
폭력, 혼란, 욕망, 분노
어두운 세계도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인 것이죠.
주인공은 밝은 세계와 동시에 어두운 세계를 모두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온전해지죠.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생각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데미안은 그 세계가 어떻게 깨지고, 다시 만들어지는지 보여줍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세계, 의미는
외부로부터, 혹은 내면으로부터
언제든 균열이 생기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영원히 안전한 세계는 없죠.
우리가 세운 '질서'와 '균형'은
언제나 도전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의미를 다시 만들어야하죠.
선택할 수 없습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은 자유로울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죠.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자유롭기 때문에 질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장폴 사르트르
새는 알에서 나가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라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20대 초반, 처음 데미안을 읽었을 때 가장 좋아했던 문구입니다.
아직은 안정적인 세계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많은 세계를 부수고 새로 만들었지만
사회로 나가기 전에는 부모님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기존 세계를 깨는 모습을 새와 알에 비유한
낭만적인 모습을 좋아했습니다.
당시 나는 열여덟의 괴짜 청년으로, 오만 가지 일에 조숙하면서 다른 오만 가지 일에는 뒤떨어지고 무력했다.
또래들과 비교할 때면 나 자신이 무척 잘났다는 건방진 생각이 들었다가도, 곧 열등감과 우울감에 빠졌다.
내가 천재 같다가도 반쯤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친구들과 섞이지 못했고 자책과 염려에 사로잡혔다. 나와 그들 사이에 절망적인 거리감이 느껴졌고,
나는 삶으로부터 격리 되었다.
20대 후반을 달리고 있는 지금
다시 읽었을 때 가장 좋아하는 문구입니다.
기존의 의미와 세계가 부숴지고 난 뒤,
그 불안정한 내면과 실존적 고통을 잘 설명하는 문구입니다.
아무런 기준도, 소속도, 확신도 없는
자기혐오와 고립감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이런 경험은 수 없이 해왔고,
앞으로도 하게 될 것 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은 언제나 다시 찾아오겠지만
결국에는 새로운 세계와 의미를 찾아낼 것이라는 걸 말이죠.
